2012년 12월 2일 일요일

정체성 사라지는 영국

영국이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는 현대에 전례 없는 인구의
대량 탈출 사태가 외국인의 기록적인 유입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이로 인해 윌
리엄 셰익스피어와 막강한 군주들의 나라이자 미국의 사상과 법률 및 문화의 요람
역할을 한 나라인 영국의 성격이 잠식될 위기에 처해 있다.

런던의 일간신문들이 머리기사로 보도하는 수치들은 진실의 일부만을 밝힐
뿐이다. 2005년 6월과 2006 년 6월 사이에 20만명에 가까운 영국 시민이 다른 곳에
서 새 삶을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같은 기간에 줄잡아 57만4000명의 이민이 영
국에 들어왔다. 이 수치 가운데는 법을 위반한 밀입국자들이나 정부에서 파악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영국 국가통계국은 중산층 시민들이 남부의 여러 도시를 빠져나오기 시작했
다고 보고한다. 남부 도시들은 다수 이민자들의 거주지가 됨으로써 여러 세대 동안
변함이 없었던 지역사회의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영국인들이 고향과 나라를 떠나는 이유는 많으나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그들은 영국의 생활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법상태와 증가하는 이
슬람 인구로 늘어나는 테러 위협 및 영국의 정체성 상실을 두려워한다. 공립학교들
이 다음 세대에 대한 영국의 역사와 문화 교육을 거부함에 따라 이러한 사태는 더
욱 악화되고 있다.

특히 소수파에 대한 공정한 정책으로 영국인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있고 있
다. 정부 관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망명을 신청한 수십만명의 외국인들이 '사면'을 받아 정착하기 일보 전에 있
다. 미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대규모 이민의 정착을 허용하려는 시도가 성공할 가능
성이 있다. 이민자들은 우선적인 공공주택 배정을 포함한 각종 사회적 혜택을 즉각
받게 될 것이다. 그 비용은 납세자들이 부담하게 된다.

영국 '이민감시' 앤드루 그린 회장의 다음과 같은 견해 표명은 미국 내에서
전개되는 논쟁을 상기시킨다. "이런 조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식 일처리의 또
다른 사례다. 영국에서는 법을 장기간 위반하면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얻는다."

영국 언론은 학교 교사를 살해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은 한 이탈리아 이민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다. 이 이탈리아 남자는 불과 12년 복역한 다음 석방되기 직전
에 있다. 영국 정부는 그를 이탈리아로 추방하기를 원하지만 영국 인권법과 유럽연
합법으로 인해 추방이 불가능하다. 그러한 사태는 정부를 전복하자고 촉구하고 청
년들의 폭력행위를 선동하는 이슬람 테러분자들 추방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국민의 절반이 노예이고 절반이 자유인인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자국민의 대량 해외이주를
초래하는 조건을 허용하는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다른 종교에 관용을 베풀지 않고 기성 사회에 적응하지
않는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다. 임신중절(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임신한 여성 5명
가운데 1명이 중절수술을 받는다)과 이민자들의 높은 출산율(영국 백인의 15배다)
에 비추어볼 때 영국의 장래는 인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내다볼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의 문제는 단순히 인구 변화만이 아니다. 양국이 모두 자국을 성
공한 나라로 만들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민와서 그 일부가 되기를 원하도록 만든
자국의 신념과 역사 및 종교적 이상의 교육을 기피하는 것이 문제다.

오 늘날의 이민들과 과거 이민들의 차이는 후자가 완전한 미국인이나 영국인
이 되기를 원했던 점이다. 현재의 이민들은 미국이나 영국을 빼어난 국가로 만든
요소들을 파괴하려 드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막기를 거부한다.

가장 큰 비극은 영국 국민이 이런 사태에 대해 발언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함
에 따라 최후의 수단인 도피의 길을 선택한 사실이다.

칼 토머스 美 신디케이트 칼럼니스트

이슬람의 한국 내 활동

이슬람의 한국 내 활동

이슬람이라는 이름이 한국인들에게 익숙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2001년 9.11사태로 온 세계가 떠들썩할 때만해도 한국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이 노상강도를 만나 살해된 사건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뒤인 2004년 6월 김선일씨 참수 사건을 접하며 ‘이슬람 테러’가 우리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도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으나 3년이 지난 뒤 2007년 7월 23명의 한국인이 탈레반에 납치되어 두 명이 살해를 당하는 아픔을 겪고 나서야 이제는 ‘이슬람’이라는 이름이 우리와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이슬람의 한국전래
이 슬람이 한국에 들어 온 것은 6.25 때 한국을 도우러 왔던 16개국 중에서 터키 병사들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타고 근로자로 나갔던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매력을 느껴 이를 받아들인 후 한국에 돌아와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슬람의 한국 전래는 50년을 넘겼다. 이들이 한국의 주류 사회를 파고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 한국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공격적인 매스컴 전략과 홍보활동으로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자화상은 사라져 가고 있으며 평화의 종교, 평등의 종교로 이미지가 바뀌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슬람의 급성장
이 슬람은 일단 성장의 고삐를 틀어쥐면 그 나라를 이슬람화 하는 속성이 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 1909년에 겨우 54명의 무슬림들이 있었고 1960년에는 1천여 명이 조금 넘어섰을 뿐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 1990년에 무슬림은 45만8천 명이 되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2005년에는 1백만 명에 육박했다. 전 국민을 다 합쳐도 1700만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이슬람이 주도권을 쥘 것은 불을 보듯 확연한 사실이다.

이는 네덜란드만의 상황이 아니다. 유럽의 전체 상황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이슬람이 성장에 필요한 준비 단계는 끝나고 상승곡선을 그리며 급성장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슬람화 전략① 취업을 가장하라
대 부분의 선교가 어려운 나라에서는 자비량 선교 혹은 비즈니스 선교라는 이름으로 각종 직업 형태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도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슬람 국가는 사업자 비자를 가지고 취업 형태를 선택한다. 한국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50만 명 정도 있다고 보는데 이들 중 20% 정도인 10만 명은 이슬람권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 중 20% 정도만 선교의 뜻을 가지고 왔다고 보면 2만 명 정도가 이슬람을 한국에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들어왔다는 계산이 나온다. 어쩌면 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사로 해외로 나간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슬람 포교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화 전략② 학교를 점령하라
선 교가 어려운 나라에 들어가는 또 한 가지 가장 쉬운 방법은 학생 비자이다. 지금 한국은 젊은 층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08년 6월 한 신문에서 28년 전과 비교해 한국의 초등학생들의 수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제 대학은 학교 재정 조달을 위해 학생들을 외국인으로 채워야 할 입장에 처했다. 그 중에서도 이슬람 국가들이 한국에 학생들을 열심히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라고 하는 서울대학교가 아직 세계 100대 대학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다. 왜 유럽 선진국의 유명한 대학들을 제쳐놓고 한국의 대학을 선택했을까를 생각해 보자. 이슬람권에서 온 학생들은 대부분 정부 장학금으로 온다. 왜 국비를 투자하면서까지 유학생들을 한국으로 보내겠는가? 사우디 정부에서는 노골적으로 수천 명을 보내겠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벌써 서울대학교에 120명의 이슬람 정부 장학금으로 온 유학생들이 열심히 포교활동
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학업을 마쳐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과 결혼하여 장기체류를 하고 정부의 중책을 맡아 한국의 법을 이슬람에게 유리하도록 고치려고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슬람화 전략③ 결혼과 출산의 고지를 점령하라
한국의 전통에 의하면 외국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으나 국제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요즘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위키 백과사전에 따르면 국제결혼으로 출산한 한국의 아이들이 지금은 0.5% 정도 되지만 2020년이 되면 약 30%가 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슬람권에서 온 사람들의 특징은 산아제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등 14개국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의 무슬림들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무슬림들이 그 나라의 주류가 될 것이다. 독일도 2041년이 되면 자국민보다 무슬림들이 더 많아 질 것이라고 한다.

한국도 평균 출산율이 1.2정도로 가장 낮은 나라들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평균 출산율은 이의 3배가 넘는 보통 3.8~4.0에 이르고 있다. 간단한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은 자녀들을 1가구당 1자녀만 낳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차세대에 인구가 50%로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일부다처에 제한 없이 자녀를 낳는다. 사우디 왕가에는 60명의 왕자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구로 점령을 한다는 말이다. 또한 한국에 들어 온 외국인 근로자들 특히 이슬람권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비자 문제 때문에 가능하면 한국인 여성들과 결혼을 하여 불법체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데 이슬람권에서 온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의미가 한국인들의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은 이슬람법에 의해서 일부다처제에서 살았고 코란에 의하면 이혼도 자유롭기 때문에 본국에 처자식이 있어도 한국에 있는 동안 시한부 결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귀국할 때는 미련 없이 헤어지거나 버리고 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것이 충격이다. 게다가 코란에 의하면 남편은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물론 한국인들도 아내를 때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아내를 때리는 것은 알라가 남편에게 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한국의 여성들은 이슬람권에서 온 남성들과 결혼을 하려고 할 때 그들이 아무리 잘 생기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할지라도 이슬람의 결혼문화를 충분히 숙지하고 그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반드시 재고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슬람화 전략④ 경제를 잡아라
유 대인이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전략에 세계의 경제를 점령하는 전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펑펑 쏟아지는 오일 달러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작은 나라들의 경제를 흔들어 놓거나 집어 삼킬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1년 예산이 2007년 기준으로 2,372억불이다. 그러나 아부다비 투자청에서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액이 이것의 4배가 넘는 1조 달러라고 한다. 한국의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중동과 아랍 산유국들의 오일 머니를 유치하는 것을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고 한다.

이 런 맥락에서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에 아랍은행이나 이슬람 은행이 생기게 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게 된다. 금융감독원도 국내 금융사의 이슬람금융 진출과 외화자금 조달처의 다변화를 위해 내년 1월 서울에서 이슬람권 금융감독기구인 이슬람금융서비스위원회(IFSB)와 함께 이슬람금융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오일달러가 들어오면 한국의 주식시장에 투자하여 대형 회사들의 주식을 사면서 대단한 영향력을 과시하게 될 것이다.

이자를 받지 않는 이슬람 은행들의 정책에 따라 한국의 무슬림들은 엄청난 자금을 대출받아 지방마다 최고급 시설의 유치원과 학교, 대규모 모스크를 지을 것이다. 주민들의 반대는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빙자하여 공권력으로 막아 줄 것이다. 막대한 오일 달러를 풀어 서방의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여 유치원과 학교를 운영하면 한국의 부모들은 너도 나도 자녀들을 등록시킬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슬람을 배우며 무슬림으로 자랄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20%라고 한다면 적어도 80%의 학부모들은 이같은 현상에 전혀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이미 한국에 이슬람 초등학교가 허가를 받아 내년부터 학생들을 모집할 것이다.

이슬람화 전략⑤ 한-아랍 소사이어티
대 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재정을 지원하는 ‘한-아랍 소사이어티’는 이미 5월 26일 발족되었으며 8월경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이들의 주요 사업은 한국과 아랍과의 친선과 문화교류로서 상호이해라는 이름으로 온갖 행사를 개최할 것이다. 또한 산유국들의 의향을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취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것이다. 각 대학에 아랍어 과목을 개설하거나 아랍어과를 신설할 수 있도록 권면함으로 한국에 무슬림 교수들을 파송할 기회를 만들고 무슬림 유학생들의 유치를 중재하여 한국 내 이슬람 확산에 직간접적으로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 외에도 한국에는 문맹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홍보물과 책자들을 만들어 배포하고 이슬람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엄청난 자금을 투자할 것이다. 코란을 혐오감이 없도록 새로 번역하고 한국의 이슬람국 대사들이 모여 대책을 수립하며 최선의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낼 것이다.

맺는 말
이제 한국교회가 이대로 무관심한 상태로 5년만 가면 대한민국은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이슬람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한국의 이슬람 세력이 조금만 더 성장을 하여 한국 내에서 자생한 이슬람 테러단체들이 생기면 그 후에는 영국처럼 폭탄테러를 당할이지 모르며 몇 차례 잔혹한 사건이 일어난 뒤 면 아무도 무서워서 이슬람의 정체를 밝히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미 국 CIA의 2007년도 보고서(The World Fact Book)에 의하면 이슬람세력이 1% 미만일 때는 무조건 평화를 가장하라는 전략이 있다. 5%에 육박하면 자생 테러단체들이 생긴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서둘러 공동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아주 쉽게 이슬람화 될 것이다. 각 교단은 이슬람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집중 연구하고 이슬람에 대한 전문가를 양성하여 교육함으로 더 이상 이슬람을 몰라서 속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슬람은 일본의 이슬람화는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한국의 이슬람화는 이미 3단 기어를 넣고 가속 페달만 밟으면 쏜살같이 급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제 이슬람에 대한 무관심에서 깨어나야 한다.

다민족 다문화란??

일단 다민족 이란 다인종을 의미합니다. 다문화는 종교 및 언어, 풍습등 일반적인 생활양식을 의미하겠지요.

그럼 지금 한국은 어느위치일까요...

한국은 단일인종 ( 단일민족 ) 다문화 사회인것 입니다. 이번 불교도 대회에서 특정 종교와의 대립을 본다면 한국은 다문화 사회의 문제를 다안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럼 이러한 사회의 분류에 대해 알아보면...

1. 다민족 다문화사회 :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등 거의 초강대국

2. 다민족 단일문화사회 : 프랑스, 스페인, 등 중급 유럽국가들이 해당

3. 단일민족 다문회사회 : 독일, 한국, 중동의 여러국가들이 해당

4. 단일민족 단일문화사회 : 일본 정도

위의 분류 정도가 되겠읍니다. 그럼 민족사회의 발달이 가장 활발한 곳은 어디일까요...

여러분 나름대로 판단해 보세요...

우리사회는 단일민족 이었기에. 그동안 종교의 갈등이 폭발하지 안은것일뿐...

이제 다민족-다인종 사회로 막접어들기 시작하는 이때...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야 하는지 심사숙고할때라고 보여집니다...

중국의 전통적 식인문화

중국의 전통적 식인문화.


중국인의 의식 내면에 있는 상호불신, 인명경시풍조와 광신적 배금유일주의의 밑바탕이 된 중국의 역사적 전통의 식인문화는 전란이나 기아 등 재난의 때가 아닌 평상(일상) 시에도 수천 년간 인육을 시장거래로 유통시키며 즐겨 먹어온 야만스런 역사상 최악의 식인종족 중국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오랜 식인전통과 보편화된 인육거래 인육요리문화, 중국의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중국의 정사(正史)에만도 220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중국에서 유교(儒敎)는 ‘복수주의(復讐主義)’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정당화되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復讐)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 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원한에 사무쳐 군중들과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에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醢-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醢), 포(脯), 자(炙)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대표적인 인육 조리법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醢)’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 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육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중국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식인풍습이 중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은 왜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를 절대 믿지 않는지, 왜 돈을 그렇게 중시하는지, 왜 먹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미동조차 않는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왜 중국인은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 다 모여 사는지, 그 엄청난 인내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 위주인지, 그래서 중국계 기업의 수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매우 폐쇄적적이고 성장규모에 한계가 있으며 기업의 존속수명도 매우 짧은 편이다. 등등


중국의 식인문화는 수천 년을 이어 면면히 지속되었고 중국 내 오랜 전통의 특이한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수가 없으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중국인의 사회문화적 기저배경 내면의식과 일상문제를 살피고자 한다면 그 저변에 깔린 중국특유의 식인풍습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서로에 대한 인간적 불신은 바로 중국의 독특하고 장구다대한 식인문화에서 기인한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식인풍습은 그의 말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의(信義) 그 자체를 없애 버렸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 때는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로 그때만 예나 도덕 따위의 단어가 나온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강자 앞에서는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중국인 특유의 철저하고 냉혹한 현실주의 사고방식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 하나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식인 풍습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 명이 뭉쳐서 숫자적 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잡아먹히는 순서로 봤을 때 머릿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이다.


임어당은 삼대 뿐 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 가족 등 거의 모든 구성원이 한 집에서 사는 중국의 대가족제도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의 인내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침묵과 순종적 인내를 강요했다.

싫어도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처세 또한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스레 몸에 익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