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일 일요일

중국의 전통적 식인문화

중국의 전통적 식인문화.


중국인의 의식 내면에 있는 상호불신, 인명경시풍조와 광신적 배금유일주의의 밑바탕이 된 중국의 역사적 전통의 식인문화는 전란이나 기아 등 재난의 때가 아닌 평상(일상) 시에도 수천 년간 인육을 시장거래로 유통시키며 즐겨 먹어온 야만스런 역사상 최악의 식인종족 중국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오랜 식인전통과 보편화된 인육거래 인육요리문화, 중국의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중국의 정사(正史)에만도 220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중국에서 유교(儒敎)는 ‘복수주의(復讐主義)’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정당화되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復讐)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 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원한에 사무쳐 군중들과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에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醢-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醢), 포(脯), 자(炙)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대표적인 인육 조리법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醢)’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 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육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중국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식인풍습이 중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은 왜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를 절대 믿지 않는지, 왜 돈을 그렇게 중시하는지, 왜 먹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미동조차 않는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왜 중국인은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 다 모여 사는지, 그 엄청난 인내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 위주인지, 그래서 중국계 기업의 수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매우 폐쇄적적이고 성장규모에 한계가 있으며 기업의 존속수명도 매우 짧은 편이다. 등등


중국의 식인문화는 수천 년을 이어 면면히 지속되었고 중국 내 오랜 전통의 특이한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수가 없으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중국인의 사회문화적 기저배경 내면의식과 일상문제를 살피고자 한다면 그 저변에 깔린 중국특유의 식인풍습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서로에 대한 인간적 불신은 바로 중국의 독특하고 장구다대한 식인문화에서 기인한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식인풍습은 그의 말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의(信義) 그 자체를 없애 버렸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 때는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로 그때만 예나 도덕 따위의 단어가 나온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강자 앞에서는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중국인 특유의 철저하고 냉혹한 현실주의 사고방식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 하나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식인 풍습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 명이 뭉쳐서 숫자적 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잡아먹히는 순서로 봤을 때 머릿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이다.


임어당은 삼대 뿐 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 가족 등 거의 모든 구성원이 한 집에서 사는 중국의 대가족제도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의 인내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침묵과 순종적 인내를 강요했다.

싫어도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처세 또한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스레 몸에 익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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